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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역사/문화 경기, 천년의 문화사 2
  • 저자 경기문화재단
  • ISBN 9788999901119
  • 페이지 352
  • 정가 15,000원
  • 판매가 15,000원 (10%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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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근본지根本地’, ‘근본지지根本之地’는 ‘뿌리가 되는 곳’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곳을 가리킨다.

‘원래의 땅’ 혹은 ’본고장‘ 정도를 이르는 ‘본지本地’, 또는 ‘중요한 곳’을 보다 강조한 말이다.

그곳은 개인이나, 개인이 속한 집단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물론 집단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개인에게는 고향 정도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성씨 집단에게는 ‘본관지本貫地’, ‘관향지貫鄕地’를 가리킬 수 있다.

즉, 사회적 집단에게는 오래전부터 그 집단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장소가 기억된다.

여기에는 역사성, 정치성, 사회성, 문화성, 기능성 등의 요소가 함께 작용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근본의 땅’이란 중요한 곳, 특히 정치성이 바탕이 되고 사회성, 문화성 등의 측면에서 “나라 전체를 지지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곳”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려 사회에서 평양(서경)은 그곳에서 발생했던 묘청妙淸의 역모를 의식해 ‘반역의 땅(叛逆之地)’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체로 고려 사직 500년 동안 최대 길지吉地(명당)라는 것 때문에 특별하게 중시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태조 왕건 이래 고려왕실 ‘근본의 땅(根本之地)’으로 여겨진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사신史臣은 태조가 여러 차례 서경에 행차해 그곳을 고려 근본의 땅으로 삼은 것을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가 멸망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의지로까지 해석했다.

한편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 또한 고려의 ‘근본지’였다.

공민왕 10년(1361) 11월. 홍건적의 침입으로 엄동설한에 국왕이 남쪽 안동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쳤다.

이때 15세의 이숭인李崇仁(1347~1392)은 곧 전쟁의 승리로 응당 국왕이 ‘근본의 땅’인 송도松都(개경)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연한 의지를 시로 읊조렸다.

두 자료의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서경과 관련한 ‘근본의 땅’이란 이해가 고려 왕실과 관련한 것이었다면, 개경과 관련한 그 이해는 고려 사직과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두 같은 뜻이다.

‘근본의 땅’이란 의미에는 밑바닥 깊숙하게 뿌리가 되는 곳이라는 인식이 스며있다.

이런 점에서 함경도 일대의 동북면東北面은 조선 왕업의 터전을 닦은 근본지였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경기전慶基殿」이란 시에서 읊고 있듯이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본향이었던 전주 또한 조선의 근본지였다.

더 나아가 ‘근본의 땅’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사용됐다.

중종 때 영의정 윤은보尹殷輔(1468~1544) 등은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경상·전라 양도를 ‘우리나라(我國) 근본의 땅(根本之地)’이라 하여 산업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고, 명종 때 강화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근본의 땅으로 설명됐다.

다른 측면에서의 용례 역시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다.

‘경기京畿’와 관련해 ‘근본의 땅’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조선 건국 바로 직전인 1391년(공양왕 3)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부담시키던 노역勞役의 징발에 대한 폐단을 조치하기 위해 염문사廉問使를 파견하는 기록에서이다.

이것은 직전에 있었던 과전법으로 토지제도를 개혁하면서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던 과전科田과 각종 사전私田의 지급대상 토지를 경기제京畿制로 한정한 조치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에 앞서 경기는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편제됐다.

국왕이 펼치는 시정施政의 우선 대상지역이라는 뜻이 보다 구체화되는 과정이었다.

조선시대에 ‘경기’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國家根本之地)’으로 규정됐다.

경기는 다른 지역과 달리 ‘나라의 바탕, 뿌리, 근원’이라는 것이다.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의 인식이었다.

여기서의 국가는 왕실이 자리하고 있는 경도京都(한양)와 일정 부분 통한다.

왕조 사회에서 왕실이 있는 경사京師는 국가 자체로 이해됐다.

즉 한양과 경기의 관계는 나무의 줄기와 뿌리의 관계였다.

한양을 나무·물에 비유한다면, 경기는 뿌리·샘과 같은 근원이었다.

중종 35년(1540)에 국왕은 경기관찰사 임백령林百齡(?~1546)에게 “나라에 경기가 있음은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샘이 있음과 같다.경기의 정치가 잘되고 못됨은 나라 전체의 무게와 관계된다”고 하며 관찰사로서의 충실한 임무 수행을 다독였다.

유진동柳辰仝(1497~1561), 조사석趙師錫(1632~1693), 이징명李徵明(1648~1699), 서문유徐文裕(1651~1707), 이언강李彦綱(1648~1716) 등 경기관찰사들을 임용할 때마다 국왕은 교서를 내려 “경기가 국가 근본의 땅”임을 잊지 말도록 명했다.

왜냐하면 ‘경기’가 흐트러진다는 것은 곧 나라의 쇠멸을 의미했다.

새겨볼만한 말이다.

경기인을 교화시키려면 인화人和가 필수였다.

그래야 ‘국가 근본의 땅’으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천년을 앞두고 역시 새겨야 한다.

여기서의 ‘경기인’이란 단지 지역적, 공간적 범위를 넘어선 사회적, 문화적 주체로서 재해석되어야하는 과제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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